정호의 진화 위하여 프로젝트

정호의 진화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동네 누나를 불러 세운다. 누나의 초상화를 그리겠다는 거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스케치북 든 여덟 살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무시할 수가 없다. 슥슥 스케치를 하더니 한참동안 그림을 그린다. 하릴없는 동네 아지매들의 입이 꼬마의 스케치를 거든다. “아이고, 똑 닮았네“ “잘 그렸다!” 꼬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혼자 집에 있을 때마다 방바닥에 배를 붙이고, 방바닥이 따끈해질 때까지 그림만 그렸다.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지도 모르고, 그냥, 무심히...

스케치북을 든 여덟 살의 정호. 그가 서른 한 살이 되었다.


작업실 겸 카페에서, 화가 정호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 가
항상 하고 있는 질문이다. 언제든 결론이 안 난다.

목적 없었던 그리기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는 해군이어서 1-3년에 한 번씩 집에 오시곤 했다. 어머니도 바깥일을 하셨고. 형은 쾌활한 성격이다 보니 밖에 주로 있었고. 나는 집에서 그림 그리고 놀고. 혼자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 귀로만 수업을 듣고 손으로는 그림만 그렸다. 교과서, 스케치북 전부 그림이었다. 어릴 때의 경우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인지가 없지 않나? 그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좋고 나쁘고 판단이 없이 그냥 항상 하는 거였다. 그림은 내게 놀이이자 여가였다. 목적이 없다.

누구도 못 말려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도 그림만 그렸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이면 연습장을 그림으로 다 채웠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친구들을 잘 못 사겼다. 동급생들은 스케치북이나 연습장을 빌려가서 돌려봤는데, 빌려 갈 때는 “나도 한번 보이도”하며 살갑게 챙겨가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인간관계는 없었다.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라도 그림을 그리지 말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머님도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림만 그리니까... 한 번은 내가 보는 앞에서 그림노트와 스케치북을 몽땅 모아서 불 태워버린 적도 있다. 그래도 내 고집이 꺾이질 않았다. 결국 초등학교 고학년 쯤 어머니께서 포기 했다. 크고 나서 “형도 그림을 좋아하는데 왜 나에게만 그랬느냐?” 여쭤봤더니 “형은 자기 살 길을 찾아 갈 것 같았지만 너는 예술가로 완전히 빠지게 될 것 같단다. 그걸 막고 싶었다.” 라고 얘기하셨다.

서른 한 살의 정호
그림에 대해서 진지해진 건 나쁜 게 아닌데 아쉬운 게 있다면 그림을 보다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까. 원래 꿈은 산에 들어가 대충 밥 먹고 살면서 그림 그리고 사는 거였다. 물론 여자친구 사귀기 전 까지(웃음) 참 어리고 멍청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살고 싶었다. 지금도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혼자 즐기면서 사는 거니까. 물론 비겁하다고 볼 순 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점점 전반적인 삶과 생활에 대한 고민, 길게는 결혼과 아이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작가 정호는 갤러리카페, CAFE51의 운영자

카페상주작가의 그림자
한동안 작업을 안했다. 사실 카페에서 상주하면서 작업한다는 게 쉽게 적응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즐기는 마음으로 참고 했는데 최근 한계에 부딪혔다. 아무래도 개인 공간이 아니다보니까 작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심리적으로 조금씩 부딪힌다. 다양한 사람들 만나는 건 재미있지만 내게는 완전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걸 못 가진지 꽤 오래됐다. 처음에는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받치더라. ‘아, 혼자 있고 싶다’

생활 곁에 작업실을 두고파
학생 때부터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분리하지 않았다. 아니면 생활하는 곳 가까이에 작업실을 두는 식이었다. 자취방을 구할 때도 작업하기 좋은 지 아닌 지를 먼저 고려했다. 작업장 바로 옆에 이불을 깔아두고 피곤하면 자는 식이었다. 하지만 카페를 운영하고, 집에선 형과 생활 하다보니 작업실을 따로 두기가 어려워졌다.

대학생활은 ‘그림으로 먹고살기’ 검증의 과정
부모님께 그림을 그려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대학생일 당시 한 달 수입이 15만원~30만원이었는데 8만원 방값 내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했다. 원래 검소하긴 하다.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안 써서. 물론 방도 내가 구했다. 입학 할때는 보증금 13만원짜리 방에 살았지만 졸업은 보증금 150만짜리 방에서 했다. 아무래도 자격지심이 좀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마음먹고 4학년 때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졸업여행비와 졸업전시회 비용(대관료, 팜플렛 비)이 겹치니까 아르바이트비로 도무지충당이 되지 않았다. 졸업전시도 준비해야했기에 시간적인 압박도 있었고... 그 때 절반 정도 지원 받았다.
내게 대학 4년은 부모님을 향한 증명의 과정이었다. ‘그림 그리며 살 수 있습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리고 설득의 과정이기도 했고. 막상 지금 생각하면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작업 구상 스케치만 100장
영감을 받더라도 즉흥적으로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에스키스(작업 구상 스케치)를 많이 하는 편이다. 지금 하고 있는 손 그림의 경우는 대학 때부터 쭉 그리기 시작했다. 과제전 으로 손 그림을 전시한 적은 있지만 본 작업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에 본 작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1년 넘게 에스키스 작업만 했다. 쭉 관찰만 하는 거다. 어떻게 방향을 정할 지에 대해서...
자화상을 한창 그릴 당시에도 구상 스케치만 100장 정도를 그렸다. 그걸 보고 놀리는 친구들도 많았다. “너는 본 작업은 안하고, 구상만 주구장창 하냐” 그런데 이게 내 스타일인걸 어떡하겠나.

자화상만 그리던 작가
인간관계를 만들더라도, 꼭 내가 실수를 하거나 틀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끝까지 잘 이끌어나가지 못하더라. 그래서 내 자신을 알아야 겠다라고 마음 먹었다. 내 자신을 알면 뭔가 깨닫지 않을까 싶어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그 생각자체도 엄청 오만한 거다. 어떻게 내 자신을 알아(웃음) 그래도 일단 내 자신만 한번 생각해보자. 해서 자화상을 그렸다.

 


대화 나누는 필자와 정호 작가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다
졸업하고 그림 그리는 생활을 이어가고 싶어서 입주 작가촌에 들어가려고 했다. 어떻게 하다보니 결국 공공미술단체에서 활동하게 됐다. 처음으로 오픈된 미술활동을 하게 됐다.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공공미술활동은 내 자신에게 큰 변화를 줬다. 물론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였는는 죽을 때쯤 되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꽉 막혀 있어도 예전의 네가 더 낫지 않았느냐? 말하는 사람이 있다. 둥글고 대하기가 편해진 지금이 좋다는 사람도 있다. 아직까진 이 변화에 대해서 객관적 평가를 내리긴 힘들다.

전시경력이 하나도 없는 작가
지금껏 ‘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다’ 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사회적으로 부끄러운 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전시경력이 하나 없다. 작가로써 성공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발표할 이유도 없었다. 자랑하거나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사람이니까 칭찬받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그림은 내게 개인적인 생산물로 느껴졌다. 이것은 나의 것.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함이 아닌 내 자신으로써 있기 위한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그림 밖에 없다. 그렇기 생각했기에 남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었고, 보여주기도 싫었다.

영감의 순간, 손을 보다
2007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병원에만 있으니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스케치북에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몇 일이 지나니까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그 때 내 손이 보였다. 마치 손의 모습이 내 기분과 일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의 손을 바로 스케치로 옮겼고 곧 손에 대한 생각으로 빠져 들었다.
만화테크닉 중에, 감정을 손동작으로 표현 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불끈’은 주먹을 쥐는 것으로 ‘슬픔’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식으로... 손을 관찰하면서 감정에 따라 손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특히 모양이 많았고, 감정표현에 힘이 많이 실렸다.


작가 정호의 손

손의 진화 Ⅰ
손의 포즈들을 쭉 그리다가 이것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뭔가 확 와닿지가 않았다. 왜 그럴까?
그 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관찰했다. 굳은 살이 박혀 있는 위치를 보면 어떤 일을 하는 지 알 수 있고, 손의 모양이나 두께를 보면 체형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지문과 손금도 다 달랐다. 사람의 생활이 묻어나는 게 바로 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체 일부의 손이 아닌 손, 그 자체로의 손을 바라보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 고민이 이어졌다. 도대체 손을 온전한 대상으로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상화를 더러 그렸으니까 초상화를 바라보는 그 관점으로 손을 바라보면 어떨까. 그래서 초상화 구도로 손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손의 진화 Ⅱ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작업은 <손 안의 스펙타클>이다. 손 그림의 조금 더 확장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손 그림인데 마치 풍경화처럼 느껴진다던가... 그런 여러 가지 느낌을 내포하고 싶다. 처음 손을 그릴 때에도 가장 구하기 쉬운 모델인 내 손만 그렸다. 지금은 그림 중에 내 손이 아닌 것도 있다. 포즈와 내용이 중요한 거지 굳이 내 손일 필요가 없는 거다.
손 그림에는 스토리가 있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 게다가 손은 ‘얼굴’만큼 특성이 강하지 않다. 사람들은 손 그림을 보고 나면 자기 손을 본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자연스레 자신의 손을 바라 보게 되고 타인과 나의 다른 점을 찾아보기도 하면서 손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길 바란다.

 


현재 작업 중인 정호 작가의 그림

나의 대중화
자화상 작업에서 손 작업으로 넘어온 것은 내게 있어 엄청난 대중화를 뜻한다. 대화의 과정이 들어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엄청난 대중화의 발견인데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지도 모른다. 가시적으로는.

그림쟁이가 돈 버는 법
화가들이 벽화나 초상화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걸 보고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 벌잖아’ 하지만 다르다. 그건 주체가 다르다. 보통은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사람을 그리고 싶지 않은데 그려야 하는 상황. 이 그림을 그리기 싫은데 그려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림으로 돈 벌고 그걸로 또 그림을 그리는 게 이상적이라 여겨 질 수도 있지만 예술인들에게는 그런 트라우마가 있다.

애매하다! 그림 가격
화가가 돈을 벌 수 있는 제일 정상적인 상태는 바로 작품을 판매하여 돈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신진작가의 경우 애매한 부분이 있다. 바로 가격이다. 작품이 유통이 되야 가격이 정해지는데 신진작가의 작품은 유통이 되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기준이나 비교가 될 수 있는 지표가 거의 없다. 렇게 되면 작가 스스로도 제대로 된 가격을 제시하기 힘들어진다. 우리는(갤러리 카페 CAFE51) 가격을 정해주는 것을 권장한다. 작가와 협의해서 그림값을 얼마로 생각하는지... 그럼 혹시 사람들이 물어보면 답해줄 수 있으니까. 작가들에게 그런 훈련이나 스스로도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는 과정이다.

 

작가 정호는 여전히 그림쟁이로써의 생존을 고민한다.

노출하는 습관
현재의 블로그를 완전히 갈아엎은 적이 있다. 전에는 그림을 올리더라도 검열의 과정을 거친 뒤, 올렸지만 지금은 좀 더 편안하게 올린다. 이런 그림도, 저런 그림도 그려봤어요. 하고 편하게... 예전에는 그림에 대해 코멘트도 쓰지 않았다. 제목과 그림만 덩그라니 올렸다. 지금은 그림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그 날의 감상과 후기도 올린다. 홍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까 얘기한 대중화, 노출하는 습관을 기르는 과정이다.

coming soon! 작가 정 호의 첫 전시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살려면 대외적인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딴 일 해서 그림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어리긴 하지만 내 후배들, 내 비슷한 처지의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도 많아졌으면 한다. 그들을 도와주려면 일단 내가 인지도가 있어야 하고 힘과 돈이 있어야 된다.
올해 전시를 하고 싶었는데 카페 전시일정을 잡다보니까, 내년으로 넘어갔다. 2013년 봄에 할 생각이다.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첫 전시, 개인전으로서는 처음이니까 누군가는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내 작업의 과정이자 결과물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욕만 하는 사람이 되기 싫다
젊은 작가들은 기성세대에 대해 비방만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도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 아닌가. 욕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행사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결국 욕만 하는 사람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려면 작가로써 자리를 잡아야 된다. 1차적인 목표는 카페모금과 전시기획하면서 신진작가들이나 미술인(순수 예술인이 아니더라도 좋다. 상업예술도 좋고)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 나 역시 작업을 이어가며 작가로 자리메김하는 것이다.

 

보증금 13만원짜리 방에 살던 신입생은 150만원짜리 방에서 졸업을 했다.
줄기차게 자화상만 그리던 청년은 이제 타인의 몸에 말을 건다.

서른 한 살의 작가, 정호는 진화한다.
자신이 가진 슬픔, 고독, 기쁨의 DNA를 잊지 않은 채 세상에 손을 내민다.

그의 손이 움직인다. 그 곳이 바로 진화의 방향이다.

글 숨별/ 사진 강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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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되는 게 그렇게 중요해? <DJ 신명식> 이우지 예술가

 "정말 사람마다 재능이란 게 다 있는 걸까?
 
만약 내 재능이 알고보면 코파기나 발톱깎기면 어쩌지? 그럼 나는 가 될까""

 대학 시절, 그림 그리는 친구가 던진 질문이다. 나는 '사람마다 다 밥벌이할 재능은 있지 않을까...'하고 대충 얼어무리고 말았다. 그 때까진 가 되는 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 후에 그 질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럴듯한 가 된다는 건 뭣처럼 어려웠다. 대학을 입학하며 끼와 재능을 조금은 인정받았다 생각했고 당연히 재능이 곧 직업으로 이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웬 걸. 졸업 후에 나를 작가로 반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나는 사회의 부속품이 되기 위해 이력서를 들고 발로 뛰어야 했다. 꼭 뒷통수를 맞은 기분이랄까. 나는 서서히 '재능'이라 믿었던 그것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때론 꿈을 원망하기도 했다.

 콘티 이야기하는 명식과 나 / 2004년 여름.

고등학교 때 난 적어도 괜찮은 가 될 것 같았다.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다. 그 때 <신명식>이라는 친구를 알게 됐다. 명식군은 내 영화의 남자주인공이기도 했다.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게 아니어서 어설펐지만 명식군은 끼가 다분했다. 명식군은 학교를 마치면 춤을 추기 위해 연습실로 달려갔고, 축제 때마다 팀을 꾸려 무대에 서기도 했다. 명식군은 어딜 내놔도 잘 노는 아이였다.

그리고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잘 노는 게 재능이었던 명식이는 어떻게 살고 있고, 지금은 가 됐을까?

  

 다행이 휴대폰엔 명식군의 번호가 있었다. 미니홈피도 그대로였고,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제의를 했고, 만났다. 무려 8년 만에... "누나, 진짜 오랜만이예요" 명식군이 나타났다. 예전처럼 씩씩하게 인사를 주고 받지만 어째 목소리가 이상하다. 

 "목이 쉬었어요. 밤마다 소리를 너무 질러서..."

 명식군은 밤마다 DJ를 하고 있었다. 놀면서 우연히 DJ를 접하게 된 것이 시작이 되어 지금까지 하고 있다. DJ를 배워주는 학원도 없고, 알려주는 데도 없었기에 어깨 너머로 DJ를 배웠다. DJ를 하면서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는 지도 알게 됐다. 명식군이 하는 일은 그것 뿐만이 아니다. 아침에는 군대 선임의 소개로 초등학교에서 체육 강사를 하고, 남은 시간을 쪼개 1인 창조기업의 대표로도 활동한다.

 

명식군의 직업은 파티플래너+ 클럽DJ+ 체육선생님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건 분명히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때로 친구들이 "DJ일은 가난하다"고 만류하면 화가 난다. 배고프면 일을 하면 되고 잠을 좀 덜 자면 된다. 그럼 배고프지 않다. DJ가 배고프다는 건 선입견일 뿐이다. 문제는 의지다.


"저는 생각 잘 안해요. 그냥 바로 해요. 행사나 축제도 기다리지 않아요.

제가 먼저 하겠다고 이야기해요.  

상남동 분수광장에서 파티가 하고 싶으면 제 장비 들고 가서 그냥 해요. 바로 하는 게 중요해요"




"저는 딴따라예요. 스스로 그렇게 얘기해요

음악하는 사람, 예체능이라는 말에도 거부감이 들어요.

예술가라는 거창한 말보다 딴따라라는 말이 좋아요"

 

 

 어릴 때부터 주목받는 게 좋았다는 명식군. 생각보다 많은 일에 도전했고, 또 세상을 알고 있었다. TV에도 나오고, 아이돌  연습생이 되기도 했다. 돈과 관련해 불미스러운 일도 겪고 재정난으로 일하던 클럽이 문을 닫는 일도 있었다. 좋게 말하면 경험이겠지만 세상에 닳아버린 청년이 내 앞에 있었다. 살면서 이제껏 명식군은 단 한번도 쉬거나 멈출 수 없었다. 이유는 하나. 밥벌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 사정은 자신을 더 바쁘게 만들었다.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지는 것. 잘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는 것. 그것이 생활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행복하냐?는 물음에 명식군은 망설인다. 

"제가 하는 일은 체계가 없어 자유로워요. 하지만 요즘은 고민이 생겼어요.

또래 친구들이 직장을 얻고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요.

뒤쳐진다는 느낌이랄까... 너무 달려오다보니 놓친 게 많다는 생각도 들구요."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이 후회 될 때가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여행 다운 여행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다. 그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는 모양이다. 스물여섯 동갑내기 친구들은 자격증을 따고, 토익시험을 준비하고, 취업을 한다. 이제 친구들은 명식군과는 전혀 다른 궤도를 돌게 될 것이다. 승진도 보너스도 없는 궤도, 길 마저도 자신이 개척해야하는 궤도에 서 있는 명식군은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명식군은 이야기한다. 아직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 갈증이 난다. 가 되는 것은 나중 문제다. 굳
직업이라 한정 짓지 않고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다. 앞으로 또 뭘 하고 싶냐는 말에 대답이 술술 나온다. '제가 커피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로스팅도 배우고 싶고 제과, 제빵 기술도 배우고 싶어요'


"어떻게 들리실 질 모르겠는데 전 꿈이 없어요.

꿈이 없어서 정말 좋아요. 꿈이 없다는 건 뭐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니까요"

 


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 26세 명식군은 세상을 놀이터라고 표현한다. 
  세상을 놀이터 삼아 미끄럼틀도 타고, 시소도 타고, 그네도 타고 싶다.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받던 질문 "뭐가 될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세상은 가 되는 것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굳이 직업으로 를 설명해야 할까? 설명이 더 길어지더라도, 자기 존재 자체로 가 되는 건 어떨까. 훗날 내가 엄마가 되거들랑 까먹지말고 자식들에게 말하고 싶다. 

"뭐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 명식군이 궁금하다면!

신명식(로빈) www.facebook.com/FantasticRO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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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만나는 진짜 재미 그림 일기


 
(위: 장두영작가와 함께, 아래: 정 호 작가와 함께)

작년 이 무렵, '과연 마산에서 글쓰는 걸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다.
진짜 막막하기만 했다. 더욱 외로웠던 건 가까운 곳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글 동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단골 카페였던 카페51의 상주작가인, 정 호씨에게 말을 걸었다.

- 나는 파워블로그도 아니고, 정식 기자도 아니예요.
  단지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인터뷰를 하고, 블로그에 올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우연처럼 화가공동체 민들레의 승훈씨를 알게 됐고, 개념미디어 바싹에서 기자로 참여하게 됐다.
바싹에서 기획한 코너도 지역의 예술가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러다 문화커뮤니티 노트에서 진행하는 젊은 예술가 인터뷰를 맡게 됐다. 7월까지.

밴드 엉클밥, DJ로빈, 글쓰는 도겸, 화가 정 호와 장두영, 사진찍는 대중.
시인 진명씨, 화가공동체 대표 승훈, 건축학도 경우, 무용가 주현, 웹툰작가 유진, 화가 정혜, 작은고추디자인,
소설가 김비, 빡빡인 건형씨...

점으로 살던 우리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 품어왔던 아이디어에 살이 보태지고, 현실이 된다.
아마 예전보다 재밌어질거다.

우리가 재밌는 일을 만들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 피드백을 주고받고, 즐겁게 노는 과정에서
문화예술을 부담없이 즐기고 소비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그래서 진짜 우리가 필요한 세상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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